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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가 감동 줄 때
1990년 11월 얘기니까 벌써 24년 지났다. 충남대가 "한 독지가가 평생 모은 30억원 상당 재산을 후학(後學) 위해 써달라며 기증해왔다"고 발표했다. 기증자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당시 보름 가까이 쫓아다닌 끝에 그 주인공이 76세 할머니이고 김밥을 팔아 모은 돈을 갖고 불린 재산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할머니가 서울의 ‘성’자로 시작하는 어느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말까지만 듣고 병원들을 뒤지며 같은 이름 환자를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제 본지 사회면에 나란히 두 기부 스토리가 실렸다. 하나는 연말이면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연락해오는 ‘얼굴 없는 천사’ 이야기다. 천사는 올해도 동전과 지폐 5000여만원을 두고 갔다. 2000년부터 ‘몰래 놓고 가는 기부’가 시작됐으니 올해로 15년째다. 얼굴 없는 천사 뉴스를 봐야 한 해가 저물었다는 실감이 든다. 노송동 주민들은 ‘천사 마을’에 산다는 자부심을 갖고 지낸다.
▶ ‘얼굴 없는 천사’ 기사 옆엔 손덕익(82)씨와 재호(55)씨, 그리고 상혁(22)·유승(18)군 형제 등 3대(代) 4명의 사진이 실렸다. 할아버지는 30년 전부터 고향 마을에, 아버지는 20년 동안 중학 야구부를 지원해왔다. 성균관대에 다니거나 이번에 합격한 아들 형제는 자기들이 받은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거나 기부하기로 했다. 집안에 무슨 유전자가 흐르기에 할아버지 뜻이 아들을 거쳐 손자들까지 이어져가나 생각해보게 된다.
▶훌륭한 기부는 많다. 그런 기부가 주는 감동은 기부금 크기에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김밥 할머니 얘기가 뭉클했던 것은 할머니 말처럼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모은 재산’이었던 덕분이 크다. 그렇더라도 할머니가 처음부터 ‘내가 이런 기부 합니다’ 하고 나섰더라면 감동은 덜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보도가 나간 뒤에도 ‘기자는 안 만난다’고 병실 문에 ‘면회 사절’ 팻말을 붙였다.
▶ ‘노송동 천사’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데다 15년째 해오는 일이다. 사회 명사(名士)나 자산가들이 하는 기부나 선행도 사회를 환히 비춰준다. 그러나 감동까지 주느냐 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 같다. 순도(純度) 높은 감동은 가슴으로 온다. 노송동 주민들은 언론에서 천사가 어떤 사람인지 찾으려 들면 ‘왜 그러느냐’며 말린다고 한다. 숨어 있을 때가 더 감동을 준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한편에선 얼굴 없는 천사를 한 번쯤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삼희 / 조선일보 논설위원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일보 [만물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