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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大 첫 재학생 장학기금 만든 손상혁씨, 그 뒤 따르는 동생]
祖父·아버지·형제 기부 집안
형, 1~2학년 내내 科 수석… 그때마다 장학금 전액 내놔
동생도 내년 같은 科 입학 "나도 같은 장학금 만들 것"
왼쪽부터 손유승(18)·손덕익(82)·손재호·손상혁(22)씨.
2011년 8월 성균관대 총괄지원팀에 한 1학년생이 찾아왔다. 첫 학기 과(科) 수석을 했다는 그는 "졸업 때까지 8학기 모조리 1등 할 겁니다. 제 이름 딴 기금 만들어주세요. 기금에 성적장학금을 모아서 졸업한 뒤 어려운 학생을 돕겠습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계속 이 정도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당돌한 제안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학생은 군대를 갔다 온 2012~2013년을 빼고 1~2학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마다 장학금 280만원 전액을 내놨다. 성균관대에서 재학생 이름을 딴 첫 장학기금을 만든 스포츠과학부 2학년 손상혁(22)씨 이야기다. 그런데 재학생 이름을 딴 장학기금이 내년 1학기 또 하나 생길 예정이다. 이번 입시에서 형과 같은 과에 수시전형 1등으로 합격한 상혁씨의 동생 유승(18)군이 "나도 장학금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대구 출신 형제는 형이 초등학생, 동생이 유치원생일 때부터 기부를 해왔다. 용돈에서 매달 1만원씩을 떼내 집 근처 장애인시설에 기부한 것이 시작이다. 상혁씨는 "우리가 기부했던 곳에 있던 장애인 누나가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대구 경신고를 나온 상혁씨는 고교 입학 때 받은 성적장학금과 용돈을 모아 2009년 독거노인 10명에게 30만원씩 기부했다. 동생 유승군도 대구고 입학 때 받은 동창회 성적 우수 장학금과 용돈을 합친 300만원을 불우 학생 돕기 성금으로 냈다. 형과 아우가 낸 각종 성금은 본인들도 다 세지 못한다.
상혁씨는 고교 시절 화장실에서도, 통학하는 버스 안에서도 영어 단어를 외웠다. "자투리 10분을 모으면 열흘이면 100분, 100일이면 1000분인데 그게 쌓이면 성적이 좋을 수밖에요." 대학에 와서도 예습·복습을 하고 중간·기말고사 공부는 2주 전부터 시작한다. 형한테 배운 동생 유승군도 줄곧 전교 1등을 달렸다. 사실 형제의 집안은 장학금을 안 받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다. 상혁씨는 "그래도 악착같이 공부하는 건 할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넉넉한 집에서 났다고 게을러서도 안 되고 예의도 모르고 남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는 말을 할아버지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고 말했다.
조부 손덕익(82)씨는 경북 의성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뒤 결혼해 아들 승호(57)·재호(55)씨를 얻은 그는 친척이 하던 건설회사에서 현장 책임자로 시작해 상무까지 오른 뒤 1985년 고향에 건설업체를 차렸다. 그는 "눈칫밥을 먹어봐야 아랫사람도 이해하고 세상살이가 처절하다는 걸 안다"며 두 아들을 회사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장남 승호씨는 1975년 대구에서 작은 중장비 업체를 차렸고 차남 재호씨는 1985년 서울의 한 속옷 업체에 취직했다. 덕익씨는 1991년·1993년에야 두 아들을 불러들였다. 건설업 호황 덕에 회사는 반석에 올랐고, 2007년에는 학원사업에도 진출했다. 덕익씨가 회장, 승호씨가 사장을 맡고 있는 회사에서 전무를 맡은 재호씨가 상혁씨 형제의 아버지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아버지는 엄했다. 상혁씨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6월 어느 날. 아버지는 아침 일찍 상혁이를 데리고 대구의 한 건설 현장으로 갔다. 상혁이는 그곳에서 인부들과 함께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철근과 벽돌을 날랐다. 어린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헉헉거려도 아버지는 본 척도 안 했다. 아저씨들이 밥과 국, 반찬을 모두 얼음물에 말아 먹을 만큼 더웠다. 엄마가 깨워야만 겨우 일어나는 아들의 모습을 며칠 지켜보던 아버지가 결행한 현장 교육이었다. 상혁씨는 그날 이후 아침에 누가 깨워서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연매출 200억~300억원, 직원 120여명을 둔 중견기업 가문이지만 어른들은 돈보다 나눔을 중시했다. 할아버지 덕익씨와 큰아버지 승호씨는 30년 전부터 고향인 의성군 춘산면에 매년 1000만원 이상을 기부해왔다. 이와 별도로 그곳 학생 43명을 일주일에 두 번씩 자신들이 운영하는 대구 학원으로 데려와 무료로 영어 수업을 받게 해준 것이 5년째다. 김재석 춘산면장은 "참으로 고마운 집안"이라고 했다. 상혁씨 형제의 아버지 재호씨도 택시기사 자녀 30명에게 6년째 무료 수업을 해주고 있고, 한 중학교 야구부를 20년간 지원해왔다. 넥센 손승락 투수가 고교 재학 시절 형편이 어려워 못 낸 야구 회비 600만원을 내준 것도 재호씨였다. 3000만원을 들여 한 고교의 낡은 책걸상과 운동장 설비를 바꿔준 일도 있다. 그런 재호씨는 20년째 대구의 109㎡(33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이사한 뒤 도배 한 번 새로 한 적 없다.
고교 성적이 월등했던 상혁씨 형제가 스포츠과학을 택한 건 아버지의 영향이다. 아버지는 "공부 잘하면 다들 의대 가지만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리도록 예방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권했다. 재호씨는 성년이 된 두 아들에게 "아버지 것을 물려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고 일러뒀다고 한다.
_ 조선일보 김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