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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가을 축제 첫날의 화제는 걸그룹의 공연도,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학생들이 운영하는 주점도 아니었다. 성균통보(成均通寶)라는 엽전이었다.
30일 오전 11시쯤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경영관 앞에서 한 학생이 "퀴즈 풀고 엽전 받아가세요!"라고 외쳤다. 황금색 엽전 1000개가 쌓인 책상 앞으로 학생들이 "웬 엽전이냐?"며 몰려들었다. 학교 근처 가게 이름들을 제시하면 어떤 가게인지 맞히는 퀴즈였다.
개인 창업자가 소규모 자본으로 운영하면서도 숨겨진 맛집을 기준으로 재학생 1000여명이 설문조사로 뽑은 칼국수·카레·떡볶이·찌개 등 맛집 10곳이 퀴즈 목록에 올랐다. 정답을 맞힌 학생들에겐 엽전 2냥이 주어졌다. 퀴즈를 낸 학생이 엽전을 나눠주며 말했다. "맛집 10곳 어디에서든 한 냥에 1000원처럼 쓸 수 있습니다!" 서울 종로 통인시장의 엽전을 본떠 만든 성균관대 버전의 골목 상권 살리기 아이디어였다.
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엽전 2냥이면 커피가 한 잔" "엽전 모아서 회식하자"며 앞다퉈 퀴즈를 풀었다. 엽전을 받은 승주완(24·수학과 4년)씨는 "엽전을 얻는 재미도 있고 상인들도 도울 수 있어 일석이조"라며 "평소 자주 가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성(26·경영학과 3년)씨는 "밥도 많이 퍼주고 엄마같이 챙겨주시는 분식집 사장님한테 보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원경(23·경제학과 3년)씨는 "학교를 3년 동안 다녔지만 구석구석 이런 맛집들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준비한 엽전 1000개 중 600여개가 하루 만에 나갔다.
엽전을 나눠준 이는 서성열(22·글로벌경제학 2년)씨였다. 서씨의 아버지는 전라도 양동시장 옆에서 작은 자전거 가게를 하고 있다. 그는 "올 추석 때 고향에서 만난 아버지가 대형 마트에 밀려 장사가 너무 어렵다고 푸념하시는 걸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작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학교 앞 풍경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엽전이란 아이디어는 전통 시장인 통인시장에서 얻었다. 통인시장은 구매한 엽전으로 원하는 반찬을 자유롭게 골라 살 수 있는 도시락 카페로 유명하다. 이 엽전 아이디어가 죽어가던 도심 시장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씨의 아이디어에 공감한 학생들 20명이 뭉쳐 엽전 1000개를 주물로 제작했다. 비용은 학교에서 댔다. 엽전은 성균통보라 이름 붙이고 전통 상인과 함께하는 성균관대학교라는 글씨를 새겼다. 한 냥에 1000원 가치가 있는 이 엽전은 학교 주변 상점 10곳에서 실제 화폐처럼 사용이 가능하다. 서씨와 함께 엽전을 만든 김영진(20·인문과학계열 1년)씨는 "어머니가 음식점도 하고 장난감 가게도 열었지만 얼마 안 돼 모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작은 화장품 가게를 하고 계시는데 어머니를 도운다는 마음에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가 되자 엽전을 든 학생들이 속속 학교 주변 음식점·카페를 찾았다. 카페 주인 염선화(47)씨는 "학생들이 엽전을 만들어 사장님 장사를 도와준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했다. 6년 전 정문 앞에 문을 연 8평짜리 염씨의 카페 주변에는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다. 염씨는 "이렇게 도와주는 학생들의 마음이 기특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학교 앞에서 12년째 인도카레집을 운영하는 샤풀(46·이란)씨는 "12년간 장사하면서 오늘처럼 감동한 날은 처음"이라고 했다.
20년째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성만(57) 사장은 "학생들의 마음이 고맙다"며 "수익금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성균관대 신입생 환영회도 하고 사법고시 합격생 파티도 하고 추억이 많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행복한데 이렇게 상인들까지 신경 써주니 고맙다"고 했다. 학생들이 사용한 엽전에 대한 결제는 축제가 끝난 뒤 학교 측에서 해줄 예정이다. 성균관대 측은 "학생들의 아이디어로 학생과 상인이 함께하는 축제를 만든 만큼 엽전 아이디어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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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지호 기자